역사

조선시대 및 일제시대의 한국 고대사 말살 (역사1)

AllTogether 2024. 7. 29.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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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말살 및 왜곡

무용총(舞踊塚) 수렵도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철저하게 말살되고 왜곡되었다. 물론,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고리가 망하면서 조선시대에 (古)朝鮮, 고구리(高句麗), 백제, 신라 및 고리(高麗) 역사 기록이 조선의 왕에의하여 철저하게 말살되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시대 말살한 역사에 근거하여 새로운 역사기록을 창작하는 수준이었다. 조선부터 일제강점기 까지의 한민족 역사 말살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태종에 이어 세조 3년(1469)에는 역사·천문·지리·음양을 기록한 모든 고대사서의 수거령

      − 예종, 성종도 궁궐서고에 분서(焚書) 및 감금(監禁)
      − 조선 조정에 감금된 역사책은 일제 강점기에 그대로 일본으로 반출

  • 삼국사기 작성 및 편찬

      − 김부식(1075~1151)은 삼국사기를 50권으로 작성하였으나, 발간하지는 못했다.

      − 고려말 (13세기 후반), 김부식 원본을 복각한 성암본 발행
      − 현재 삼국사기는 정덕본(1512), 옥산서원본(1573)으로 2018년1월 국보로 지정
      − 문제는 조선시대 발간하면서 권44~권50 (7권)을 1권으로 발간하여 6권 분량의 기록을 삭제

  • 일제의 역사말살 및 식민사관 창조

      − 총독부 부설 조선사편수회(朝鮮史編修會)(1925) 설립, 이마니스류(今西龍) 주도하고, 이병도가 적극 부역
      − 역사 말살의 핵심은 (고)조선 역사를 지우는 것

      − 고대사 역사책중 원본이 존재하는 역사책은 거의 없다.
조선사편수회에 참가하여 일본의 식민사관 창조 작업에 부역한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에서 행해진 역사왜곡에 대하여 잘못된 점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서 교과서 보완이 시급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병도의 역사왜곡을 고백한 조선일보 기사 (1986년 10월 9일)

 
일본이 조선 궁궐서고에서 도둑질해 가지고 간 역사자료는 아직도 일본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왕실 서고(書庫)에서 털끝하나 상하지 않은 채로 고스란히 잠자고 있는 한민족 역사책을 확인한  청주(淸州) 사람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씨가 확인하여 주고있다.

삼국사기 왜곡

삼국사기(三國史記)는 고려 중기인 12세기에 국왕 인종(仁宗)의 명으로 김부식이 작성한 역사서이다. 김부식이 작성한 삼국사기는 고려말 편찬된 보물 제722호 성암본(권44~권50의 7책을 1책으로 편찬)이 가장 오래된 역사책이고, 조선시대에 편찬된 옥산서원본(1573년)과 정독본(1512년)이 있으며 작성에 참여한 학자는 아래와 같다.

  • 편수(編修) : 김부식(金富軾)
  • 관구(管句) : 정습명(鄭襲明)
  • 동관구(同管句) : 김충효(金忠孝)
  • 참고(叅考): 김영온·최우보·이황중·박동주·서안정·허홍재·이온문·최산보

삼국사기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본기(本紀), 표(表), 지(志), 열전(列傳)으로 구성된 50권의 기전체(紀傳體) 역사서로서 아래와 같이 총 5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 본기: 신라 12권, 고구려 10권, 백제 6권

세 권의 연표를 두고, 그 뒤로 제사·음악·색복(色服)·거기(車騎)·기용(器用)·옥사(屋舍)를 다룬 잡지(雜志)가 수록되었다

  • 지리지(地理志): 신라 3권, 고구려와 백제를 합쳐 1권
  • 직관지(職官志) : 3권
  • 열전: 10권 (김유신, 궁예(弓裔), 견훤(甄萱))

三國史記: 三國有名未詳地分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상세치 않은 곳)

삼국사기 끝부분에는 삼국의 이름만 있고 위치가 상세하지 않은 지명이 358개소가 기록되어있다. 고려시대 작성한 김부식은 지명의 위치도 모르면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편찬하면서 명나라의 눈치를 보면서 대륙에 위치한 지명을 알면서도 모른다고 둘러댄듯 하다.
三國有名未詳地分 (삼국의 이름만 있고 그 위치가 상세치 않은 곳)

조선 태종, 세조, 예종, 성종이 없앤 역사책

아래 표는 조선시대 태종, 세종, 예종, 성종 시기에 조정에서 수거하여 없앤 한민족 역사책이다. 언급횟수는 4대 왕이 내린 명령에 중복적으로 언급된 횟수를 의미하며 (고)조선이 기술된 신비집의 경우 태종이 특별히 언급하며 태워버린 역사책으로 조선의 입장에서 명나라에 대하여 매우 곤란한 (고)조선 역사가 기술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순번 책 제목언급
횟수
순번 책 제목언급
횟수
1《경전석문(經典釋文)》 29《신비집(神祕集)》태종 특별 언급
2《계원필경(桂苑筆耕)》 30《신조보동비요(新彫保童秘要)》 
3《고려역대사적(高麗歷代事迹)》 31《안함노 원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환단고기 삼성기
4《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 32《오음지장도(五音指掌圖)》 
5《광운(廣韻)》 33《오장육부도(五臟六腑圖)》 
6《광제방(廣濟方)》 34《이아(爾雅)》 
7《국어(國語)》 35《전정록(前定錄)》 
8《귀곡자(鬼谷子)》 36《전한서(前漢書)》 
9《대광익회옥편(大廣益會玉篇)》 37《전후한저명론(前後漢著明論)》 
10《대변설(大辯說)》· 38《조대기(朝代記)》· 
11《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39《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3
12《도선참기(道銑讖記)》 40《지공기(志公記)》3
13《도증기(道證記)》3 41《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3
14《동천록(動天錄)》· 42《지화록(地華錄)》3
15《마슬록(磨蝨錄)》· 43《책부원귀(冊府元龜)》   
16《명경수(明鏡數)》2 44《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 
17《무성왕묘찬(武成王廟讚)》 45《통천록(通天錄)》· 
18《문선(文選)》 46《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 
19《문수(文粹)》 47《표훈천사(表訓天詞)》2
20《백호통(白虎通)》 48《호중록(壺中錄)》3
21《병요(兵要)》 49《황제소문(黃帝素問)》 
22《본초요괄(本草要括)》 50《후한서(後漢書)》 
23《산해경(山海經)》 51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 
24《삼성밀기(三聖密記)》2 52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 
25《소아소씨병원후론(小兒巢氏病源候論)》  53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 
26《수찬기소(修撰企所)》 1백여 권(卷) 54왕숙화(王叔和) 《맥결구의변오(脈訣口義辯誤)》 
27《신농본초도(神農本草圖)》 55유향(劉向) 《설원(說苑)》 
28《신당서(新唐書)》 56진랑중(陳郞中) 《약명시(藥名詩)》 

태종실록 24태종 128월7일 기미 2번째 기사 (명 영락 永樂 10년)

태종은 태종12년 8월에 아래와 같이 전국에 지시를 내린다. 태종은 명나라 영락제가 화하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작업을 진행하는데 보조를 맟추어 한민족의 역사기록을 없애는 작업을 시작했다고 볼수밖에 없다. 특히, (고)조선 역사의 삭제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었던거 같다. (고)조선 역사기록이 수록된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말고 별도로 봉하여 특별히 관리토록 지시하였으며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을 통하여 불태운것이 태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命史官金尙直, 取忠州史庫書冊以進。 《小兒巢氏病源候論》、《大廣益會玉篇》、《鬼谷子》、《五臟六腑圖》、《新彫保童秘要》、《廣濟方》、陳郞中 《藥名詩》、《神農本草圖》、《本草要括》、《五音指掌圖》、《廣韻》、《經典釋文》、《國語》、《爾雅》、《白虎通》、劉向 《說苑》、《山海經》、王叔和 《脈訣口義辨誤》、《前定錄》、《黃帝素問》、《武成王廟讃》、《兵要》、《前後漢著明論》、《桂苑筆耕》、《前漢書》、《後漢書》、《文粹》、《文選》、《高麗歷代事迹》、《新唐書》、《神秘集》、《冊府元龜》等書冊也。 且命曰: "《神秘集》, 毋得披閱, 而別封以進。"上覽其集曰: "此書所載, 皆怪誕不經之說。" 命代言柳思訥焚之, 其餘下春秋館藏之。

 
사관(史官) 김상직(金尙直)에게 명하여 충주(忠州) 사고(史庫)의 서적을 가져다 바치게 하였는데, 《소아소씨병원후론(小兒巢氏病源候論)》·《대광익회옥편(大廣益會玉篇)》·《귀곡자(鬼谷子)》·《오장육부도(五臟六腑圖)》·《신조보동비요(新彫保童秘要)》·《광제방(廣濟方)》·진랑중(陳郞中) 《약명시(藥名詩)》·《신농본초도(神農本草圖)》·《본초요괄(本草要括)》·《오음지장도(五音指掌圖)》·《광운(廣韻)》·《경전석문(經典釋文)》·《국어(國語)》·《이아(爾雅)》·《백호통(白虎通)》·유향(劉向) 《설원(說苑)》·《산해경(山海經)》·왕숙화(王叔和) 《맥결구의변오(脈訣口義辯誤)》·《전정록(前定錄)》·《황제소문(黃帝素問)》·《무성왕묘찬(武成王廟讚)》·《병요(兵要)》·《전후한저명론(前後漢著明論)》·《계원필경(桂苑筆耕)》·《전한서(前漢書)》·《후한서(後漢書)》·《문수(文粹)》·《문선(文選)》·《고려역대사적(高麗歷代事迹)》·《신당서(新唐書)》·《신비집(神祕集)》·《책부원귀(冊府元龜)》 등의 책이었다. 또 명하였다. "《신비집(神祕集)》은 펴보지 못하게 하고 따로 봉하여 올리라." 임금이 그 책을 보고 말하기를, "이 책에 실린 것은 모두 괴탄(怪誕)하고 불경(不經)한 설(說)들이다." 하고, 대언(代言) 유사눌(柳思訥)에게 명하여 이를 불사르게 하고, 그 나머지는 춘추관(春秋館)에 내려 간직하게 하였다.

세조실록 7권 세조3년 5월26일 무자 3번쨰 기사 

세조도 즉위 3년차에 역사관련 책자를 수거하여 우리민족의 고대 역사를 말살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諭八道觀察使曰: "《古朝鮮秘詞》、《大辯說》、《朝代記》、《周南逸士記》、《誌公記》、《表訓三聖密記》、《安含 老元 董仲三聖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山ㆍ王居仁ㆍ薛業等三人記錄《修撰企所》一百餘卷、《動天錄》、《磨蝨錄》、《通天錄》、《壺中錄》、《地華錄》、《道詵漢都讖記》等文書, 不宜藏於私處, 如有藏者, 許令進上, 以自願書冊回賜, 其廣諭公私及寺社。"
 
팔도 관찰사(八道觀察使)에게 유시(諭示)하기를, "《고조선 비사(古朝鮮秘詞)》·《대변설(大辯說)》·《조대기(朝代記)》·《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誌公記)》·《표훈삼성밀기(表訓三聖密記)》·《안함 노원 동중 삼성기(安含老元董仲三聖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산(文泰山)·왕거인(王居人)·설업(薛業) 등 삼인 기록(三人記錄) 《수찬기소(修撰企所)》 1백여 권(卷)과 《동천록(動天錄)》·《마슬록(磨蝨錄)》·《통천록(通天錄)》·《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도선 한도참기(道詵漢都讖記)》 등의 문서(文書)는 마땅히 사처(私處)에 간직해서는 안되니, 만약 간직한 사람이 있으면 진상(進上)하도록 허가하고, 자원(自願)하는 서책(書冊)을 가지고 회사(回賜)할 것이니, 그것을 관청·민간 및 사사(寺社)에 널리 효유(曉諭)하라." 하였다.

예종실록 7, 예종 1년 9월 18일 무술 3번째 기사

예종은 즉위 다음해에 역사관련 책자를 수거하여 우리민족의 고대 역사를 말살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傳于禮曹曰: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沙良訓》、文泰ㆍ玉居仁ㆍ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壺中錄》、《地華錄》、《明鏡數》, 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家藏者, 京中限十月晦日, 呈承政院, 外方近道十一月晦日, 遠道十二月晦日, 納所居邑。 納者超二階, 自願受賞者及公私賤口, 賞綿布五十匹, 隱匿不納者, 許人陳告, 告者依上項論賞, 匿者處斬。 其速諭中外。"
 
예조(禮曹)에 전교하기를,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하사량훈(智異聖母河沙良訓)》, 문태(文泰)·옥거인(玉居仁)·설업(薛業) 세 사람의 기(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 및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집에 간수하고 있는 자는, 경중(京中)에서는 10월 그믐날까지 한정하여 승정원(承政院)에 바치고, 외방(外方)에서는 가까운 도(道)는 11월 그믐날까지, 먼 도(道)는 12월 그믐날까지 거주하는 고을에 바치라. 바친 자는 2품계를 높여 주되, 상받기를 원하는 자 및 공사 천구(公私賤口)에게는 면포(綿布) 50필(匹)를 상주며, 숨기고 바치지 않는 자는 다른 사람의 진고(陳告)를 받아들여 진고한 자에게 위의 항목에 따라 논상(論賞)하고, 숨긴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 그것을 중외(中外)에 속히 유시하라." 하였다.

성종실록 1, 성종 즉위년 12월 9일 6번째 기사

성종은 11월28일 즉위하고 다음달 12월 9일 , 11일 만에 여러도의 관찰사(觀察使)에 명하여 역사관련 책자를 수거하여 우리민족의 고대 역사를 말살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다른 왕에 비교하여 성종은 역사말살 작업을 신속하게 추진하였다.

 
下書諸道觀察使曰: 前者, 《周南逸士記》、《志公記》、《表訓天詞》、《三聖密記》、《道證記》、《智異聖母河少良訓》, 文泰、王居仁、薛業三人記一百餘卷, 《壺中錄》、《地華錄》、《明鏡數》及凡干天文、地理、陰陽諸書, 無遺搜覓上送事, 曾已下諭。 上項《明鏡數》以上九冊、《太一金鏡式》、《道詵讖記》, 依前諭上送, 餘書勿更收納, 其已收者還給。
 
여러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에게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전일에 《주남일사기(周南逸士記)》·《지공기(志公記)》·《표훈천사(表訓天詞)》·《삼성밀기(三聖密記)》·《도증기(道證記)》·《지리성모하소량훈(智異聖母河少良訓)》, 문태(文泰)·왕거인(王居仁)·설업(薛業) 삼인기(三人記) 1백여 권과, 《호중록(壺中錄)》·《지화록(地華錄)》·《명경수(明鏡數)》와 모든 천문(天文)·지리(地理)·음양(陰陽)에 관계되는 서적들을 빠짐없이 찾아내어 서울로 올려보낼 일을 이미 하유(下諭)했으니, 상항(上項) 《명경수(明鏡數)》 이상의 9책과 《태일금경식(太一金鏡式)》·《도선참기(道銑讖記)》는 전일의 하유(下諭)에 의거하여 서울로 올려보내고 나머지 책은 다시 수납(收納)하지 말도록 하고, 그 이미 수납(收納)한 것은 돌려주도록 하라." 하였다.

일제의 역사말살 및 식민사관 창조

일제강점기 시절 한국사를 연구 편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부설로 1925년 6월에 칙령(勅令) 제218호로 조선사편수회관제(朝鮮史編修會官制)를 공포하고 조선사편수회를 발족시켰다. 조선사편수회는 조선총독부 정무총감(政務總監)을 회장으로, 일본과 한국학자를 수사관(修史官) · 수사관보(修史官補)로 임명하고 조선사 편수 실무를 담당케 하였다.

  • 사료 수집사무-채방부(採訪部)-수사관 홍희(洪憙)․ 정비부(整備部)-촉탁 중촌영효(中村榮孝),
  • 사료 편찬사무-사적정본(史籍定本)-촉탁 금서룡(今西龍) · 사적해제(史籍解題)-수사관보 고교탁이(高橋琢二),
  • 직관표(職官表)-수사관 홍희,
  • 조선사 편찬-제1∼6편찬부-편수관 촉탁 금서룡, 수사관보 이병도(李丙燾), 촉탁 중촌영효, 수사관 도엽암길(稻葉岩吉), 수사관보 학견입길(鶴見立吉), 수사관보 고교탁이, 촉탁 뇌야마웅(瀨野馬熊).

이마니스류(今西龍)가 주도하고, 이병도가 적극 부역하며 한민족의 역사 말살의 핵심은 (고)조선 역사를 지우는 것

  • 『조선사』 : 1938년 37책 간행
  •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수집 사료 간운데 20종을 선택해 간행
  •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  3책, 귀중 기록 · 고문서 · 사적 · 필적 · 화상 등은 콜로타이프 판으로 묶어 간행

조선사편수회는 1945년 8·15광복과 더불어 해산의 운명을 맞았다.

(왼쪽) 1925년 10월 8일 열린 조선사편수회 제1차 회의 모습 (오른쪽)편수 자료를 살펴보는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앞쪽) 출처 : 매일신보

 
조선사편수회 참여한 동경제국대학 건축학과 교수겸 건축사인 세키노 다다시 (關野貞, 1868~1935)의 일기가 공개되어 파문을 낳았다. 그는 현재의 평양을 낙랑군으로 왜곡하는 작업의 핵심문제를 조작한 범인이다.

세키노 다다시 (關野貞, 1868~1935)
세키노 다다시는 1910년 조선총독부의 위촉으로 한반도와 중국의 古건축 조사업무를 담당하며 조선사편수회의 역사왜곡의 핵심 문제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작업을 수행하였다.
  • 1911년 9월 30일, 점제현 치지 발견
  • 1911년 10월 15일, 대방태수 장무이묘와 대방군치지 발견
  • 1913년 9월 23일, 낙랑군 치치 발견
  • 1913년 9월 26일, 점제현 신사비 발견
  • 1923년 10월 22일, 효문묘동종 발견
세키노 다다시는 1932년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를 출간하여 낙랑군이 현재의 평양에 있었다는 가설을 확립할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여 우리민족의 역사를 한반도로 한정하는데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여 조선사편수회의 역사왜곡과 식민사관 수립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파문이 일어난 문제의 세기노 다다시의 일기는 세키노 다다시가 북경(北京)의 유리창(琉璃廠)가의 골동품점에서 평양에서 발견된것처럼 위조에 사용될 골동품을 다량 구매한것을 기록하여 놓았다. 그 자세한 일기 기록은 아래와 같다. 세키노 다다시 관련한 자세한 자료는 매림 역사문화TV가 방송한 [대한민국 국민이 다 속았다! 평양 낙랑군 유물]. 유적발굴자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 일기장 원문 전격공개!를 참조 바랍니다.

  • 대정(大正) 7년(1918) 3월 20일 맑은 베이징, “(베이징) 유리창가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朝鮮總督府博物館ノ爲メ) 한대(漢代)의 발굴품을 300여엔에 구입함”
1918년 세키노 다다시 3월20일 일기
  • 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竹村)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한대(漢代)의 발굴물이 많고, 낙랑 출토품은 대체로 모두 잘 갖춰져 있기에(樂浪出土類品ハ大抵皆在リ)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1918년 세키노 다다시 3월22일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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