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민족은 한반도에 갇혀있어 우리 선조들이 외국과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 선조들은 한반도 밖의 대륙에 위치한 북방유목민족 출신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시대에 외국과의 활발한 교류를 하였던것으로 외국 역사기록에서 확인되고 있다. 주요한 교류 품목으로 신라의 비단, 나침반과 고려의 인쇄술, 인삼등이 대표적이라고 할수있다. 이러한 사실은 아래와 같은 기술의 발달과 해외와의 넓은 접촉으로 확인되고 있다고 할수 있다.
아래는 외국 역사기록에서 우리의 고대국가와의 교류를 확인해주는 몇 가지 사례이다,
카자흐스탄 역사책에 기록된 우리 선조 케레이에 대한 이야기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지만 이를 근거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중요한 사실이 확인된것은 큰 소득이라고 할수있다.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카자흐스탄은 유럽이 다 들어갈(동유럽 및 북유럽 포함) 정도로 국가 면적이 큰 나라이다. 대홍수 시기에 높은 고지대로 대피한 일단의 민족들이 파미르 고원에서 생활했던것으로 예상되고, 대홍수 시기가 끝나면서 (대략12,000년전) 현재의 신장 위그르 자치구 지역의 보그다 산이 있는 우르무치에서 현재의 카자흐스탄 지역으로 일만 년 전에 이동하였으며 당시에 면요리를 먹었다. 카자흐스탄이 지명한 파미르 고원에 대한 기록은 우리나라 역사책 부도지와 환단고기에도 기록되어 있다.
카자흐스탄은 오르타주스, 크스주수, 울르주스의 3개 주와 각 주스 내에는 130개 민족이 살고있다. 김정민 박사는 큽샥, 케레이(겨례), 제투르, 노가이, 캉르(강족, 한겨례), 위슨 부족이 우리 한민족과 혈연적 연관이 있는있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카자흐스탄 정부는 130개 민족의 기원을 기록한 족보를 작성하여 관리하고 있다.
소비에트 연방 해체와 함께 독립한 카자흐스탄은 단군(텡그리) 사상을 유지하며 고조선 국가체제 시스템과 유사한 시스템을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고 한다. (단군의 나라 카자흐스탄 1부, 단군의 흔적을 찾아서, 김정민 박사님 유튜브 22분경) 아래는 카자흐스탄이 추진하는 시스템과 (고)조선 시스템을 비교한 표이다.
분 류 | 한국 | 카자흐스탄 | 비고 |
부족 명 | 색족 | 삭족 | |
신의 명칭 | 단군 (당골레) | 탱그리 | |
국가 명 | 조선(주신) | 주스(주잔) | |
연맹 부족명 | 마한, 진한, 변한 | 오르타, 크스, 울루 | |
수도 명 | 아사달 | 아스타나 |
아래는 2016년 9월 16일 카자흐스탄의 중앙은행이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을 기념하는 주화를 발행했다. '단군 신화' 기념주화는 액면가 500텡게(우리 돈 1,700원) 짜리 은화와 액면가 100텡게(우리 돈 340원) 짜리 니켈합금 등 2종류이다. 은화와 니켈합금 2종류는 같은 모양으로 제작됐는데, 은화는 Proof(고품질, 무결점 주화종류)급으로 만들어졌다. 무게 24g, 지름 37mm인 은화는 2천 개를, 무게 11.17g, 지름 31mm인 니켈합금 주화는 10만 개를 발행했다.
주화 앞면에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문장이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단군 신화에 나오는 박달나무 아래, 곰과 호랑이 사이에 앉아 있는 단군이 묘사돼 있고, 오른쪽 윗쪽에 한글로 '단군전'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단 타르타리아(Tartaria)의 어원은 '주잔'에 대한 발음으로 부터 파생된것으로 추측한다. 국가명은 ‘주신(조선)’, ‘주스(주잔)는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 발음인 '조선'의 카자흐스탄 발음이다. 이 발음은 한문의 단단(檀檀)과 음차문자 관련이 있고 이 단단의 중국 및 카자흐스탄 발음이 '탄탄' (유튜브 25분 20초)이라고 하고 이 탄탄에서 타르타리아(Tartaria)가 파생된것으로 추측한다.
서양에서는 타르타리아에 대한 역사 기록을 철저하게 배제한다. 그러나, 아래에 나열되는 몇가지 기록에서 나오는 증거를 유추할때 아무 근거없이 막무가내로 배제할수 있는 역사가 아니다.
< 카자흐스탄 정부 발행 족보 기록>
타르타리아 제국으로 예측되는 12환국에 대한 기록은 카자흐스탄 정부발행 역사기록에 나온다. 아래는 카자흐스탄 역사기록에 나오는 한국(韓國)계 민족의 이동 기록이다. 놀랍게도 이 기록은 환단고기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9개의 위그르 부족. 위그르 한국계 민족 들이 9~10세기 경에 10위그루 -> 9위그르족이라 불렸던 고대 왕국으로 몽골 아르항가이의 '오르타 발륵'을 중심으로 12연방국가를 건설했다" (유튜브 14분 50초) 카자흐스탄 언어로 오르타는 중앙, 발륵은 물고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 환단고기의 12환국관련 기록>
환단고기에는 위 역사기록과 거의 동일한 기록이 환단고기 삼성기 하에 존재한다. 환단고기 기록은 아래와 같다.
"古記云 波奈留之山下 有桓仁氏之國 天海以東之地 亦稱波奈留之國. 其地廣 南北五萬里 東西二萬餘里 揔言桓國 分言則卑離國 養雲國 寇莫汗國 勾茶川國 一群國 虞婁國一云畢那國 客賢汗國 勾牟額國 賣勾餘國一云稷臼多國 斯納阿國 鮮稗國一稱豕韋國或云通古斯國 須密爾國 合十二國也. 天海 今曰北海"
『고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波奈留山(파내류산, 파미르고원) 아래에 환인(桓仁)씨의 나라가 있으니 天海(천해)의 동쪽 땅을 또한 파내류국이라 한다. 그 땅의 넓이는 남북으로 5만리요, 동서로 2만여리이니 통틀어 환국(桓國)이라 했다. 이 환국은 다시 여러 나라로 구성되었는데, 그 이름은 卑離國(비리국), 養雲國(양운국), 寇莫汗國(구막한국), 勾茶川國(구다천국), 一群國(일군국), 虞婁國(우루국) 일명 畢那國(필나국), 客賢汗國(객현한국), 勾牟額國(구모액국), 賣勾餘國(매구여국) 일명 稷臼多國(직구다국), 斯納阿國(사납아국), 鮮稗國(선패국) 일명 豕韋國(시위국) 또는 通古斯國(통고사국), 須密爾國(수밀이국, 수메르)으로 합하여 12국이다. 천해는 지금의 북해(北海)이다.
카자흐스탄 국가 발행 역사기록과 환단고기 기록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돌궐제국의 퀼테킨 비문 기록>
퀼 테긴(Kül Tigin; 闕特勤 궐특근, 685년 ~ 731년)은 돌궐 제2제국의 장군이다. 일테리쉬 카간의 아들이며 빌게카간의 동생이다. 카파간 카간 치세 당시 견곤(키르기스), 튀르게시, 카를루크를 정복하고 돌궐의 영토를 오늘날 데르벤트까지 넓혔다. 이를 기리고자 몽골수도 울라바토르 서쪽 400여Km 떨어진 아르항가이 아이막 호쇼차이담이란 곳에 비석을 세웠는데, 이 비석이 1200년후인 19세기 후반 러시아 학자에 의해 발견되었다. 높이 3.75m의 이비문에 8세기 돌궐제국의 사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퀼테킨 장군의 비석 1면 4번째 문장으로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이 문장으로 최소 AD731년 이전부터 타르타리아 국가가 존재가 했었다는 증거로 볼수있다.
"... As mourners and laments there came from the east, the representatives of the people of the Böküli Čölüg (Korea), Tabγač (Chinese), Avar, Rome, Kirgiz, Uc-Quriqan, Otuz-Tatar, Qitaŋ and Tatabi, this many people came and mourned and lamented. So famous kagans were they. ..."
"... 애도자와 애도자들이 동쪽에서 왔을 때, Böküli Čölüg(고구리), Tabγač(당나라), Avar(유연), Rome(로마제국), Kirgiz, Uc-Quriqan, Otuz-Tatar(타르타리아), Qitaŋ(거란), Tatabi의 사람들의 대표자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와서 애도하고 애도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유명한 카간들이었습니다. ..."
이 지도는 1806년에 작성된 지도로 퀼테킨이 사망한 731년과 대비하여 1천년 후에 작성된 지도로 실제 퀼테킨이 언급한 타르타리아와 이 지도의 타르타리아는 다른 국가로 추정된다. 실제로 731년 환국으로 예상되는 타르타리아 관련 자료는 찾기가 쉽지않고, 다만, 환단고기에서 언급하는 환국과 퀼테킨의 타르타리아는 동일한 나라로 추측된다. 즉, 환단고기 기록에 신뢰도를 주는 퀼테킨의 비문이라고 할 수 있다.
<천산산맥에 위치한 한단군봉 (韓檀君奉, Khan- Tengri)>
“칸 텡그리”(韓檀君奉, Khan- Tengri)산은 천산산맥(天山山脉)산으로 중국, 키르기스스탄, 카자흐스탄의 3개 나라가 만나는 지점에 있으며 고도는 지질학적으로는 6,995m지만 빙하를 고려하면 7,010m이다.
“칸 텡그리”라는 이름은 카자흐어로 "천국의 왕" 또는 몽골어로 "하늘의 왕"을 의미하며, 아마도 텡그리즘과 중앙아시아 불교에 모두 존재하는 하늘의 신 단군(檀君, 텡그리, Tengri)를 말한다. 지역 주민들은 눈 거인의 독특한 아름다움 때문에 이 산을 칸텡그리(Khan-Tengri)라고 명명했다. 이 봉우리는 키르기스스탄 100 솜 지폐에 나타납니다.
(몽고어: Хан Тэнгэр, 카자흐어: Хан Тэңірі, Han Táńiri, حان تاڭئرئ; 키르기스어: Хан-Теңири Han-Teñiri, حان-تڕڭىرى; 위구르어 : انتڕڭرى , 중국어 간체 :汗腾格里峰; 중국어 번체 :汗騰格里峰; 병음 : Hànténggélϐ Fēng , Xiao'erjing : هًا تٍْ قْ لِ بعْ)
기원전 5세기와 6세기의 로마인들은 한(漢)나라 이전의 비단길을 통해 동아시아에서 비단을 가져온 사람들을 "세레스"(Seres)라고 불렀다. 세레스의 다양한 디자인의 비단은 복잡한 패턴과 높은 실 밀도가 특징이었으며, 얇은 "중국 비단"(China silk)과는 현저히 다른 물건이었다.
화하족의 지나(支那)뜻하는 시나에(Sinae)라는 명칭은 해상으로 전해지고, 세레스·세리카는 육상으로 전해졌는데, 어원에 관해서는 정설(定說)이 없으나, 일반적으로 비단을 의미하는 세르(ser)·세리쿰(sericum) 등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지리적, 계보적 기록과 언어적 증거에 따라 "세레스"가 초기 신라 사람들이라는 삼단논법적 결론이 나온다. 기원전 7세기 세레스의 영토는 진(秦)이나 주(周)의 영토보다 훨씬 컸으며, 신장에서 발해까지 뻗어 있었다. 인하대 나영주 교수가 작성한 논문 “Seres” Silk People Were Silla (2021년 2월 22일, 인하대) 논문을 참고하면 동이(東夷)는 누에나무가 풍부한 발해 주변에서 기원전 11세기에 금(錦) 비단을 발명했습니다. 한(漢)나라에서는 얇은 비단조차 귀하고 비쌌지만, (고)조선(朝鮮)에서는 금비단이 흔했고 구슬보다 가치가 낮았습니다.
신라는 서양에 많은 양의 금비단, 모피, 양질의 철분을 공급했습니다. 언어적 증거로 신라의 역사적 명칭인 "시라" (Sira), "사로"(Saro), "세레"(Sere)와 신라의 루리왕을 "세리지"(Seri-Ji)로 명명한 기록, 고구려어의 "실감개"(yarn winder)에서 "세레스"라는 단어를 "실크"로 대체한 "실꾸리"(sil-kkury)가 포함돈다.
실제로 삼국유사 기록에 의하면 초기 신라의 국명은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 사라(斯羅), 사로(斯盧)라고도 하였으며 나중에 신라라는 국명을 사용하게 된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國號徐羅伐又徐伐 今俗訓亰字云徐伐以此故也, 或云斯羅又斯盧. 初王生於雞井故或云雞林國, 以其雞龍現瑞也. 一說脫解王時得金閼智而雞鳴於林中, 乃攺國號爲雞林. 後世遂定新羅之號.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 지금 경(京)자의 뜻을 우리말로 서벌이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이라 하고 더러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도 하였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났으므로 혹은 일러서 계림국(鷄林國) 이라고도 하니 계룡(鷄龍)이 상서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일설(一說)에는 탈해왕(脫解王) 때에 김알지(金閼智)를 얻으면서 숲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나라 이름을 계림(鷄林)으로 고쳤다고 한다. 후세에 와서는 드디어 신라(新羅)라고 이름을 정하였다.
삼국사기 신라의 시조 혁거세 17년에 혁거세가 6부를 순행하며 백성들의 생활을 살폈고 농사와 영잠 산업을 독려하는 기록이 있다.
十七年, 王巡撫六部, 妃閼英從焉. 勸督農桑, 以盡地利.
17년(B.C. 41)에 왕이 6부(六部)를 돌면서 백성들을 살폈는데, 왕비 알영(閼英)도 왕을 따라갔다. 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독려하여 땅이 주는 이로움을 다 얻도록 하였다.
쿠쉬나메(کوش نامه) 라는 이란의 하킴 이란샨 아불 카이에가 501년~1111년 사이에 쓴 역사서사시로 신라 공주와 신라로 망명온 페르시아 왕자가 결혼하고, 이 둘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페르시아를 되찾는다는 역사서사시이다. 서사시는 두 편으로 나뉘는데, “바실라(Basilla)”, “신라(Silla)” 등으로 표기된 신라 부분은 후편에 속해있다. 신라의 군대, 지리적 상황, 대도시들, 부속도서, 천체관, 과학정보, 종교, 인문학적 대화, 스포츠, 사냥, 궁전 생활 등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페르시아에서 작성한 쿠쉬나메는 ‘페르시아와 신라가 혈맹관계’ 였음을 알리는 방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요약하면 멸망한 사산조 페르시아(226~651)의 왕자가 신라 공주와 혼인해서 왕자를 생산하고, 그 왕자가 귀국해서 아랍의 폭정자(자하크)를 물리친다는 내용이다. 총 800여 쪽 가운데 신라 관련 부분만 500여쪽에 이른다.
역사기록과 비교하면, 사산조 페르시아는 637년 카디시야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한 뒤 모술·니하반도·하마드한·라이·이스파한 등 주요도시들을 잇달아 잃으면서 멸망하고, 사산조 페르시아의 마지막 황제 야즈데게르드(재위 632~651)의 왕자 페로즈(피루즈·?~708)는 끝까지 저항했으며, 중국으로 망명한 뒤에는 이란인 잔존세력을 이끌고 공동체를 이루었다.
쿠샤나메의 줄거리 자체가 실제로는 일어나지 못한 '아랍에 대한 이란의 복수'로 끝나는 데서 알 수 있듯 애초에 이 이야기는 현실적인 역사 기록이 아니라 페르시아의 대체역사물급 고전 문학이다.
중동의 이슬람 상인은 광주(廣州), 천주(泉州), 복주(福州), 항주(杭州), 양주(揚州)를 중심으로 하는 5대 국제도시에 대규모 이슬람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양주를 중심으로 북쪽의 ‘중국-신라-일본’의 교역권은 장보고 중심의 신라 해상세력이 장악하였고, 남쪽의 ‘중국-인도차이나-아랍 제국’을 연결하는 남해 무역은 아랍·페르시아 상인이 장악하였다.
팔레르모 에 있는 로저 2세 왕의 궁정에서 봉사한 무슬림 지리학자이자 지도 제작자인 Muhammad al-Idrisi (1100– 1165)는 신라의 금에 대해 강조하면서 1154년에 편찬한 세계 지도에는 신라가 다섯 개의 큰 섬으로 묘사하였다.
이븐 쿠르다지바(Ibn Khurdahibah; 820~912)는 846년에 편찬한 『제 도로(諸道路) 및 제 왕국(諸王國) 안내서(案內書)』 (Kitāb al Masālik w’al Mamālik,'Book of Routes and Kingdoms', 'The Book of Roads and Provinces')에서 신라에 거주하는 무슬림에 대해 언급한 최초의 이슬람 지리학자이다. "칸수의 맞은편 중국의 맨 끝에 신라라는 산이 많은 나라가 있다. 그 나라는 영주국들로 갈라져 있다. 그곳에는 금이 풍부하다. 이 나라에 와서 영구 정착한 이슬람교도들은 그곳의 여러 가지 이점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나라(신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 마수디(al-Mas’udi; 896~956)는 한반도에 이라크인이 진출, 거주하였다고 하였으며 알 카즈위니(al-Qazwini)는1250년 발간된 <제국유적과 인류소식>에서 신라인의 생활상을 이렇듯 생생하게 전했다. “신라는 살기 좋고 이점이 많으며, 금이 풍부하기 때문에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정착해서 떠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알 카즈위니는 "신라주민들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으며, 병도 적다"고 까지 극찬하기에 이른다. 신라는 중국의 맨 끝에 있는 매우 유쾌한 나라이다. 공기가 순수하고 물이 맑고 토양이 비옥하여 병을 볼 수 없는 곳이다. 그 주민들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있고 또 가장 건강하다. 만약에 그들이 집에 물을 뿌리면 호박의 향기가 난다고 말한다. 전염병과 다른 병도 그곳에는 드물고 또 파리와 날짐승도 거의 없다. 다른 섬의 어떤 환자가 신라에 오면 완치된다고 한다."
무하마드 빈 자카리야 알-라지(Muhammad bin Zakariya al-Razi)는 “누구나 이 섬에 들어가면 그 나라가 살기 좋으므로 정착해서 떠나려 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그곳에는 이로운 점이 많고 금이 풍부하다. 하나님만이 그 진실을 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처용가(處容歌)의 처용의 외모가 중동 지역 사람과도 비슷하다고 해서 이것이 신라와 중동의 교역 증거라는 말도 있다. 아래는 처용가 원문이다.
東京明期月良, 夜入伊遊行如可, 入良沙寢矣見昆, 脚烏伊四是良羅, 二兮隐吾下於叱古, 二兮隐誰支下焉古, 本矣吾下是如馬於隐,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리 왕조는 베트남 역사상 최초의 장기 집권 왕조였다. 1009년, 탕롱(Thăng Long, 지금의 하노이)으로 천도를 했고, 9대 216년간 베트남을 통치했다. 그런데, 리 왕조 통치기간 수많은 권력 싸움과 멸망을 피해서 통치세력이 고려로 망명온 사례가 두번있었다.
리 왕조 인종(仁宗)의 셋째 아들 이양혼(李陽焜)이 황위 쟁탈전 권력싸움에 밀려 북송으로 망명했다가 북송마저 금나라에 멸망하고, 남송이 세워진 후에 이웃 국가인 고려로 망명해 정착했고, 그를 조상으로 삼는 정선 이씨가 있다.
또한, 리 왕조가 멸망할 때 멸족을 두려워한 혜종의 숙부 이용상(李龍祥, Lý Long Tường)이 자신의 가족들을 데리고 일족이 몰살당하기 전에 고려로 망명, 귀화하면서 고려에 정착, 그를 조상으로 삼는 화산 이씨가 있다.
1996년에 베트남에서는 770년만에 리 왕조의 후예들이 왔다고 화제가 된 적도 있다. 베트남 정부에서 화산 이씨와 정선 이씨를 리 왕조의 후예로 공식 인정했으며, 베트남에서 살 경우 출입국 관리, 세금, 사업권 등에서 베트남인과 동일한 특혜를 주고, 리 왕조가 출범한 음력 3월 15일이면 공식 행사까지 연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금속활자의 비밀들(우광훈 감독)> 제작팀은 2015년 8월 바티칸 비밀문서 수장고에서 로마 교황 요한 22세가 1333년 라틴어로 고려 충숙왕에게 쓴 편지를 발견했다. '존경하는 고려인들의 국왕께'로 시작되는 감사의 편지는 니콜라스라는 사제가 북경으로 향하는 도중 사라져, 최종적으로 충숙왕에게 전달됐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교황청은 당시 서한을 작성함과 동시에 이를 기록·보관하기 위해 필사본을 남겼고, 이 필사본은 여러 필사본을 모은 서한집에 들어 있다고 한다. 특히 편지 내용은 당시 교황청 사제들이 고려에 직접 건너갔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편지에는 "왕께서 그곳(고려) 그리스도인들에게 잘 대해 주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 기뻤습니다"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지금까지는 1594년 임진왜란 때 왔던 스페인 출신 세스페데스 신부가 한반도에 온 최초 유럽인으로 기록돼 있다. 다큐멘터리를 만든 우광훈 감독은 "편지의 발견은 유럽인과 한국인의 교류사를 261년 앞당겨 다시 서술해야 할 역사적 사건임은 물론이고, 한국교회사를 수정해야 하는 새로운 역사적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제작진은 "바티칸 비밀 수장고에는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고 서한 필사본도 양피지로 만들어져 700년 가까이 지났지만, 보관 상태가 양호했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세계종교평화협의회도 2016년 6월 말 바티칸기록원에서 고문서 담당 엔리코 플라이아니 박사를 만나 요한 22세가 고려왕에게 보내는 라틴어 서신을 확인하고 두 장짜리 사본을 확보했다고 밝힌 바 있다고 한다.
이와 관련 한국의 고대사 역사를 제대로 복원해서 고려의 국가 위치와 당시의 생활습관 및 문화에 대해 보다 사실적으로 확인되어야 하겠다. 이런 정황은 고려에 기독교 교인이 있었고, 국가의 위치도 대륙에 있었다는 정황 증거로 보는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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