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일반적인 개념은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모든 나라를 화하족(華夏族, 현재의 중국사람)이 세웠다고 생각할수 있다. 현재 중국대륙을 장악한 나라가 화하족의 중화인민공화국이니 당연한 이야기다. 그러나 중국 역사를 자세히 연구해보면 삼황오제의 신화 기간을 제외하고 중국 대륙은 우리의 선조인 북방민족이 70%의 기간을, 화하족의 남방민족이 30%의 기간을 지배하여, 오히려 우리 선조의 대륙 지배기간이 더 길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근거를 제시하겠다. 현재 중국 대륙에 주거하는 화하족들은 오랜 피지배층의 역사로 지배층인 선비족, 몽골인들의 혼혈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선비족의 오랜 지배와 몽골인, 만주족의 지배를 받아 화하족들은 선비족, 몽골인, 만주족 등 중국 동북 지역 인종과 혼혈의 특이성을 보인다. 그래서 현재 중국공산당이 진행하는 동북공정은 동이족의 역사인 고구려 백제 신라의 역사를 본인들의 역사에 편입하는 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화하족은 동남아시아 미얀마, 캄보디아, 베트남 등에 살던 남방민족이 5000년~3000년전 사천성 부근에서 삼성퇴(三星堆)문화와 바오둔문화(寶墩文化)와 황하 주변의 양사오(仰韶文化)를 이루면서 살아온 민족이다. 아래는 화하족 중심으로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고대국가에 대한 테이블이다. 표에서 보듯이 노란색으로 표시된 국가 만이 화하족의 국가이고 나머지는 동이족으로 대표되는 선비(흉노), 여진, 몽골 등 북방민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중국의 초기 국가를 건립한 건국 시조와 이의 민족을 검토하여야 건국된 나라의 진정한 민족적 구성을 알수있다. 물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동이족, 화하족 및 기타 이민족이 섞여 살고있으나, 지배층의 민족으로 나라 민족적 특성을 구분한다. 아래는 중국 대륙에 건국되었던 중요 고대국가의 건국자에 대한 일종의 가계도(족보?)이다. 아래 표는 역사적 사료를 근거로 작성되었으며, 고대 초기의 국가는 동이족이 주도적으로 국가를 건설한것을 알수있다.
중국 전설상의 왕조이다. 오제(五帝)의 한 사람인 요임금의 말년, 홍수가 일어나 우(禹)가 치수 사업에 성공했다. 그 공으로 순임금(舜)이 죽은 후, 제후(諸侯)들이 받들어 동이족의 주 거주지인 하남성 양성(陽城)에 (현재의 登封市) 하(夏)를 세워 17대가 이어졌다.
하(夏)왕조의 시조가 되는 우(禹)는 요(堯) 시대에 치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舜)에게 추천 받는 방식으로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았고, 공적을 이루어 크게 인정받았다. 우(禹)왕은 순(舜)으로 부터 선위(禪位)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하(夏)나라 건국은 BCE 2070년으로 알려졌으니, 사마천도 기원전 841년 이전의 역사는 알 방법이 없다고 천명했다.
우(禹)의 부(父)가 곤(鯀)이고 그 조부는 전욱(顓頊)이며 증조부는 창의(昌意)로 헌원(軒轅)의 아들이다. 따라서 우(禹)는 황제의 현손(玄孫)이고 전욱(顓頊)의 손자가 된다 (夏나라 시조 禹왕은 東夷족)
순(舜)임금은 우(禹)를 하늘에 천거하여 임금의 자리를 계승하도록 했다. 17년이 지나고 순임금은 죽었다. 3년 상이 끝나자, 우는 제위를 사양하고 순임금의 아들인 상균을 피해 “양성(陽城)”으로 갔다. 그러자 천하 제후들은 모두 상균을 떠나 우(禹)에게 조회를 하러 몰려왔다. 우는 마침내 천자의 지위에 올라 남면하고 천하에 임했다. 나라 이름을 하후(夏后)라 하고, 성을 사씨姒氏라 했다.
부도지 19장의 기록은 사기 하본기와는 다른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우왕의 아버지를 죽인자가 순임금이므로, 둘의 관계는 원한이 있는 관계로 선위(禪位)를 받았다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아래는 부도지 제19장의 현실적인 기록이다.
요(堯)는 감금되어 죽고 순(舜)은 창오(廣五) 광야로 도망하니 추종자들이 흩어졌다.
요(堯)의 제자 우(禹)는 순(舜)이 본인의 아버지를 죽인 것에 원한을 품고 순(舜)을 쫓아가서 죽였다. 순의 두명의아내도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환단고기 단군세기 4세 단군 오사구 단군에 아래와 같은 하나라와의 기록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사마천의 하나라 건국 기록 63년전에 이미 하나라가 존재한것으로 나온다,
하나라 존재는 죽서기년, 서경(書經), 사기 등의 기록과 얼리터우(二里頭文化) 유적과 이의 연관성에 대한 고고학적 분석이다. 夏나라 당대의 문헌자료는 없으며, 서양에서는 夏의 존재를 절대 인정 안한다.
상(商)나라는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 즉, 탕왕이 건국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商)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시조는 아니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된다. 상나라는 설(卨, 契)이 건국하여, 하(夏)나라의 제후국으로 존재하다가, 탕왕때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를 중원의 1인자 만든 천자는 탕왕이라는 것이 《사기》의 기록이다.
史記, 殷本記에 상나라 건국 시조와 관련한 아래의 기록이 있다
은나라 시조 설(契)의 어머니는 간적(簡狄)이다. 간적은 유용씨의 딸로 제곡(帝嚳)의 두 번째 비(妃)가 되었다. 세 사람이 목욕하러 갔을 때 현조(玄鳥)가 그 알을 떨어뜨린 것을 보고 간적이 이를 삼키고 임신해 설(契)을 낳았다. 설이 성장해 우(禹)왕의 치수사업을 보좌하는 공이 있었다 (즉, 商나라의 시조는 동이족)
(하) 걸왕이 유융씨(有娀氏) 옛 땅에서 상탕과 싸워 패하고 명조(鳴條)로 달아나자, 하나라 군사들이 흩어져 무너졌다. 탕임금이 삼종(三嵕)을 정벌하여 많은 보물들을 획득하자 신하 의백(義伯)과 중백(仲伯)이 전보(典寶)를 지었다. 탕이 하(夏)를 정벌하고 신사(神社)를 옮기려고 했으나 그럴 수 없었다. 그래서 하사(夏社)를 지었다. 이윤(伊尹)이 하(夏)를 정벌한 공적을 제후들에게 공포했다. 이로써 제후들은 모두 탕의 명을 받들어 귀의했다. 상탕이 천자의 자리에 올라 천하를 안정시켰다.
하나라가 상나라로 정권이 교체되는 사건에 (고)조선의 13세 단군 흘달이 개입한 기록이 환단고기에 기록되어있다. 상나라가 하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자. 당시 하나라의 걸왕이 (고)조선 흘달 단군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흘단 단군은 상나라 탕왕을 만류해서 하나라를 도왔다. 그런데, 걸왕이 흘단 단군에게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흘달 단군이 상나라와 함께 하나라를 공격하여 하나라를 멸망시켰다.
겨울, 은(殷)나라 사람이 하(夏)나라를 치려하자 夏나라 걸(桀)왕이 구원을 청하였다. 임금께서 읍차(邑借) 말량(末良)에게 구환의 병사를 이끌고 전투를 돕게 하셨다. 이에 탕(湯)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군사를 되돌리라 명하셨다.
이때 걸이 약속을 어기고 군사를 보내어 길을 막고 맹약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마침내 은나라 사람과 함께 걸을 치는 한편, 은밀히 신지(臣智) 우량(于亮)을 보내어 견군(畎軍)을 이끌고 낙랑(樂浪) 군사와 합세하여 관중의 빈(邠, 咸陽)·기(岐, 岐山) 땅을 점령하여 주둔시키고 관제(官制)를 설치하셨다.
아래는 상나라 건국기간의 수도 이전 내용과 핵심강역에 대하여 자세한 검토의견을 제시한 유투브 "북경반점 北京饭店"님이 세밀하게 작성한 내용을 제시한다. 상나라 8도읍 동이족 상나라 수도의 변천과 핵심강역 유튜브 영상. 아래그림은 북경반점이 역사문서를 검토하여 작성한 상나라 도읍 이전에 관한 지도이다.
주나라는 상나라의 서쪽에 위치한 제후국으로, 오르도스(鄂尔多斯) 고원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오르도스에서 유목민 농작물 약탈에 시달리는 것을 피해, 고공단보 (古公亶父) 대에 상나라의 서쪽, 현재 산시성 서북쪽 기산(岐山)에 정착했고, 주 문왕 시대에 국(國)으로서 주나라의 정체성이 확립된다. 주나라는 상나라에 조공을 바치면서 우호적으로 지내다가도 때때로 상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던 중 상나라의 주왕의 폭정으로 주나라 내부에서 무너져가는 상나라를 몰아내고 새로운 통치 왕조를 열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전통적으로 두 국가 사이 대대적인 전쟁은 BC 1111년경에 벌어졌던 것으로 추측한다. 문왕의 아들 무왕이 45,000여 명의 군대와 300여 개의 전차를 이끌고 황하를 건너 목야 전투(牧野戰鬪)에서 상나라 왕 주왕을 몰아내고 중국 전역을 차지했으며, 무왕이 죽은 이후 주공 단(周公旦)과 성왕의 시대에 통치 체계가 완성되었다.
− 상(商)나라 주왕(纣王)은 제후국인 주(周)의 文王을 7년간 구금
− 풀려난 文王은 민심을 수습하고 강태공(강상, 姜尙)을 얻어 중용
− 周의 文王이 상(商)나라를 공격할 기반을 조성
2월 갑자일, 무왕은 아침 商의 목야(牧野)에 이르러 맹서했다. 周의 무왕(武王)은 4만5천으로 목야(牧野)에서 商의70만 대군을 대파 (史記, 周本記)
“용(庸), 촉(蜀), 강(羌, 하나라 종족), 무(髳, 묘족), 미(微), 노(盧), 팽(彭), 복(濮)의 동맹족 사람들이여!”, 사기집해, “八國皆蠻夷戎狄”, 팔국은 모두 만이융적(蠻夷戎狄)이다”,
− 백인종의 특징을 지닌 두상, 복식 및 벽화 발굴
− 1975년 북경 창평(昌平) 백부(白浮)의 서주(西周)초기 묘에서 인도유럽인의 특징
− 1976년 감숙성 영대 백초파의 서주(西周) 묘에서 청동극 위의 백인 인두상 발견
− 1980년 섬서성 부풍의 서주(西周) 궁전 유적지에서 중앙아시아 셈족의 인면상 유골 발견
머리위에 “十”자 (“巫“) 기호는 BC 5500년전의 서아시아 칼라프(Khalaf) 문화에서 유래
− 최초의 전차는 서아시아 메소포타미아 지역, BC3000년경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수메르인이 사용
− 실크로드로 중앙아시아에서 말을 수입, 商나라 멸망 시킬 때 300대의 마차로 공격
− 말(馬)에 대한 명칭이 한문으로 해석이 불가능한 음차문자 사용하여 뜻을 알지 못한다
− 즉, 주나라 갑골문을 식별을 할 수는 있지만 뜻을 해독할 수 없다
진(秦)은 중국 최초의 통일 왕조로, 동아시아 최초의 국가원수를 황제로 지칭한 제국이다. 국성은 영성 조씨(嬴姓趙氏) 또는 영성 진씨(嬴姓秦氏)다. 본래 춘추전국시대의 국가 중 하나였던 진나라는 기원전 4세기쯤 전국 시대 때 상앙이 행한 법가에 따른 개혁에 의해 급속도로 강성해졌고, 기원전 221년에 진 시황제에 의해 전국 시대를 통일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국가가 되었다.
진나라의 지배기간 동안, 중국에서는 무역이 증가하였고 농업이 발전되었으며 치안이 강화되었다. 또한 토지 지주제를 폐지하여 중앙정부가 국민들을 직접 통치할 수 있었다. 진시황(秦始皇)은 만리장성, 아방궁, 진시황릉과 같은 대규모의 토목공사들을 벌였으며, 화폐, 도량형 등을 통일하며 중국을 단일한 문화권으로 묶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진나라는 통일 중국을 15년이라는 극히 짧은 기간 동안 통치하였으나, 통일 왕조의 기반을 놓고 황제 체제를 확립하였다는 점에서 중국 역사 전반에 크나큰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의 사기 진본기에는 진나라를 건국한 시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위에 제시한 고대국가 주요 인물에 대한 가계도 참고)
진(秦)의 선조는 제전욱(帝顓頊)의 먼 후손인 여수(女修)다. 여수가 베를 짜고 있는데 제비가 알을 떨어뜨려서 여수가 이 알을 삼키고 아들 대업(大業)을 낳았다.
BC 900년 경, 대업(大業)의 10대손 대락(大駱)의 아들 비자(非子)가 말 생산과 관련한 공적을 인정받아 영(嬴)이라는 성을 받고 대부가 되어, 감숙성 리현 부근에 진(秦) 땅에 영지를 받았다.
최근 <중국사회과학보>에 실린 하얼빈사범대 왕훙쥔(王洪軍) 교수의 글이 그 한 예다. 왕 교수는 계년을 인용해 진(秦)나라의 기원이 동쪽지역이라고 주장했다. 계년에 의하면 주나라 성왕(成王)은 상(商)나라 유민의 반란을 진압한 뒤 지금의 동부 산둥성(山東省) 상개(商盖)의 주민을 서부 간쑤성(甘肅省) 주어로 이주시켰는데, 이들이 바로 진나라의 조상이 됐다. 그전까지 진나라의 조상은 산둥의 담과 거 등과 이웃하면서 영이나 진(秦) 일대에 살았다. 이들은 이주 후 주나라 왕실의 말을 기르는 일을 하다가 주나라가 동천(東遷)한 뒤 제후가 된 것이다. 왕 교수는 진나라의 기원에 대해 동이설(東夷說)과 서융설(西戎說)이 대립했으나 계년의 발견으로 동이설이 설득력을 얻게 됐다고 결론을 내렸다.
− 왕국유(王國維)는 <진도읍고(秦都邑考)>에서 "진나라의 조상은 융적(戎狄)이다“.
− 역사학자 신후(申侯), 웅철기(熊鐵基) 등이 동의
− 서욱생(徐旭生)은 <中国古史的传说时代>에서 秦의 조상은 동이(東夷)족이라고 주장
− 고힐강(顧頡剛) 전목(錢穆), 임검명(林劍鳴) 등이 동조
결론적으로 秦나라 건국 및 지배세력은 華夏족이 아니고 동이족이다. 이 사실을 객관적으로 입증하는 역사자료가 현재 청화대학교에 보관중인 청화간(清華簡) 계년(繫年)이다.
『계년』은 청화대학에서 소장하고 있는 전국시대 죽간에 포함되어 있는 문헌이다. 이 문헌에는 본래 제목이 없으나,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서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므로 청화대학에서는 정리하면서 繫年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학자들은 이 문헌이 초(楚)나라 숙왕(肅王) 때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데, 『죽서기년(竹書紀年)』보다 오래된 것이다. 『계년』은 총 138개의 죽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약간의 훼손을 제외하고는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문헌은 기존 역사서인 『사기(史記)』, 『국어(國語)』, 『좌전(左傳)』 등에 누락되어 있는 이야기를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계년>(繫年), 竹書에 진(秦) 건국 시조와 과 관련한 기록이 나온다. 청화간 계년 작성시기는 BC381~BC376으로 추정되며, 사기 작성시기(BC109~BC91)보다 250여년 더 오래전에 기록되었으며, 진(秦)이 중원을 통일하기(BC221) 150여전에 기록으로 사마천의 사기보다 신뢰성이 높다고 할수있다.
아래는 외율재(畏栗齋)라는 블로거가 작성한 『繫年』 3장은 13호간부터 16호간까지 총 4개의 죽간으로 삼감(三監)의 난과 진(秦)의 기원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주나라때 반란을 일으킨 상엄(商奄)(산동성 제령시(濟寧市)의 곡부(曲阜市))에 거주하던 동이족을 주어(朱圉) (감숙성 감곡(甘谷) 모가평(毛家坪))로 옮겼는데 이들이 진(秦)나라를 세운 주체이다. 이 기록에서 핵심되는 내용은 진나라를 세운 민족이 동이족(東夷族)이라는 사실이 확인된것이다
주 무왕이 은(殷)을 정복한 다음 은에 삼감(三監)을 설치했다. 무왕이 죽자, 상읍이 반란을 일으켜 삼감을 죽이고 녹자경(祿子耿) 세웠다 (BCE 1043년) . 성왕이 계속해서 상읍을 정벌하여 녹자경을 죽이니, 비렴(飛廉)이 동쪽 상개(商奄)씨의 땅으로 도망가고, 성왕은 상개 땅을 정벌하여 비렴(飛廉)을 죽이고, 상개의 백성(商盍之民)들을 서쪽 주어(邾圉) 땅으로 옮겨 노예군대를 관리하도록 했는데, 이들이 진나라의 선조이다.
중국 "전국철학사회과학공작판공실(全國哲學社會科學工作辦公室)"에 올라온 청화대학교 교수이자 출토문서보호센터 소장인 李學勤씨의 "從歷史深處走來—寫在“清華簡《系年》與古史新探研究叢書”出版之際"에서 계년(系年) 관련한 소회를 기록하고 있다. 그가 보는 계년은 객관적인 역사 기록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한다.
『 紀年 』와 『 系年 』은 모두 전국시대 사람들이 편찬한 역사서로, 일부 학자들이 지적하듯이 상호 비교하여 역사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꽤 많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계년>은 여전히 <기년>과 다른 특징이 많다. 우선 두 책은 서로 다른 시대에 쓰여졌고, 저자의 국적도 다르다.
《기년》는 전국 말기 위(魏)나라 때의 위(魏)나라 사람들의 입장을 토대로 쓴 것으로, 주(周)나라가 동진한 후 진(晉)왕의 이름을 사용하여 기록하였다. 진나라가 분열된 후에는 위왕(魏王)의 이름을 사용하여 연대를 기록하였다.
『계년』은 『기년』보다 몇십 년 앞선 전국시대 중엽 초(楚) 소소왕(蘇隆王) 때 쓴 것이며 비록 저자가 초(楚) 출신일지라도 그는 楚 입장에 국한하지 않고 때때로 楚를 비판하기까지 한다.
이 점은 『기년(紀年)』과 달리, 『계년(系年)』의 기록이 객관적으로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다
진나라를 건국한 민족이 동이족이라는 학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유튜브로 제시한 "북경반점 北京饭店 "님의 해당 영상을 제시한다. 이 유튜브 영상 21분경에 진시황이 동이족이라는 최신 학설을 제시한다.
후한(後漢) 멸망(220년) 후 370년간의 삼국시대와 5호16국,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흉노, 선비 계열의 북방 민족과 남방에서 진출한 화하(華夏)족이 자연스럽게 섞이게 되었으며, 소위 胡漢융합시대가 된것이다. 특히 흉노 계열 유연(劉淵)의 전조(前趙) 건국(304년)에서 선비 계열 북위(北魏)의 통일(439년)에 이르는 130년의 5호16국 시대는 북방민족이 중국을 통치했던 시기다.
북위(北魏) 왕조 (386~535)가 건국되자 수도 평성(平成)의 안전을 위해 주변에 6개 군성(회수진, 오천진, 부명진 등)을 설치해 외적을 방어했다. 그러나 북위가 수도가 낙양(洛陽)으로 천도(494년)하면서 평성의 중요성이 낮아지고 6개 성의 귀족들의 지위가 곤두박질쳤고, 처우도 좋지 않았다. 6성 귀족들의 불만은 점차 커져 정광 4년(523년)에 6성봉기가 일어났다.
참고로 북위(北魏)는 488년, 490년 두 차례 백제를 공격했다가 패퇴한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 권26, 백제본기 제4 東城王),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36, 영명 6년), 남제서(南齊書, 권58, 열전 제39, 東南夷, 영명8년조)에 기록되어 있다.
이후 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隋)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 386~535)가 동위(東魏, 534~550)와 서위(西魏, 535~556)로 분열된 후 북방에서의 분쟁은 북제(北齊, 550~577)와 북주(北周, 557~581)의 다툼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北周, 557~581)가 북제(北齊) 를 정복하여 북주(北周)로 통일되며 종식되었다. 이 시기는 우리 선조의 고구려(高句麗), 백제(百濟), 신라(新羅)의 삼국(三國)이 각축하던 시기이다.
오르도스 고원 북쪽 무천진(현재 武川县) 지역에 위치하였던 무천진군벌(武川鎮軍閥)은 관중(關中)과 용산(龍山)에 조용히 등장한 세력이다. 이 세력은 비록 어려운 시기에 탄생했지만 4대 왕조, 서위(西魏), 북주(北周), 수(隋)와 당(唐)의 지배계급을 형성한 군벌집단이며, 관롱집단(関隴集団)이라고도 한다.
관롱세족(關隴世族) 혹은 무천집단(武川集團)은 중국의 역사학자 천인커(陳寅恪)가 제시한 개념으로, 남북조 시대의 서위, 북주에서 수나라, 당나라에 이르는 기간 동안 관중(關中, 현재의 산시성)과 농서(隴西, 현재의 간쑤성 동남)에 본적을 둔 문벌세족을 가리킨다.
서위(西魏)의 우문태(宇文泰)가 집권하면서 부병제(府兵制)를 창설하여 팔주국(八柱國), 12대장군(大将军), 24개부(开府)를 설치했는데, 이것이 병농일치(兵農一致)를 이상(理想)으로 한 군대(軍隊) 제도(制度) 부병제의 핵심이 되었다. 이 군사제도에서 핵심 인물의 대부분은 관롱집단(关陇集团)에서 나왔습니다.
중국 외부의 적에서 내부의 지배 계층으로 변모한 북방 민족들은 통치체제 안정과 선진 문물 습득을 위한 적극적인 동화 정책을 펼쳐 이민족과 한족 혼혈의 귀족 계급이 등장했고, 당나라를 세운 이세민의 가문도 이에 해당됐다. 당시 선비족의 실력자 독고신의 딸로 수문제 양견의 정비(正妃)인 독고 황후가 이세민의 부친 이연의 이모였다. 수양제(隋煬帝) 양충(楊忠)과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은 이종사촌이어서 수(隋)와 당(唐)은 혈연이 깊은 같은 집안이다.
수(隋)는 한(漢)나라 이후 삼국시대와 남북조 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왕조이다. 수나라를 건국한 양씨(楊氏) 일족은 북위(北魏) 초기 선비족 무사들이 주둔하고 있던 무천진(武川鎭)으로 이주하였고, 팔주국(八柱國) 관롱집단(關隴集團, 지방 토호 세력)의 양견(楊堅, 후에 隋文帝)은 양충(楊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충은 西魏의 수국공(隨國公)이자 대사공이다. 원래, 양견은 선비족이, 선비족 이름은 보육여(普六茹)였다. 보육여는 선비어로 '버들'을 뜻한다.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돌궐에 대한 공격을 준비하던 중, 북주(北周)의 황제 무제가 병사하며 581년 양견(楊堅)이 북주(北周,550~577)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를 건국하고 수문제(隋文帝)의 직위에 오른다. 588년에 수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여 만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589년) 진(陳)을 정복하고 400여 년 가깝게 지속되던 위진남북조시대가 끝이 났다. 수도는 대흥(大興, 현재 西安) (581년 ~ 605년)과 동도(東都 현재 落陽) (605년 ~ 619년)이다
당(唐, 618년~907년)은 수와 오대 십국 사이 존재한 중국의 통일 왕조이기도 한데, 618년 6월 18일에 양제가 휘하의 장수인 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하자, 關隴集團 출신 이연(李淵)이 아들 이건성, 이세민및 태원(太原) 호족들과 함께 隋나라 수도 장안(長安)을 공격하여 11월에 長安성 함락하는 구테타를 일으켜, 이모부(문제 양견)가 세운 수를 멸망시키고 세운 국가이다.
수도는 장안(長安 , 현재 서안, 618년 ~ 904년)과 낙양(904년 ~ 907년)이었다. 초대 황제인 이연은 수 양제의 이종사촌으로, 수나라 말기에 권력을 잡아 수나라를 무너뜨리고 당나라를 건국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아들인 이세민에게 의하여 강제로 양위해야만 했다.
수나라 때와 마찬가지로 당나라는 선비족 8주국 군사를 통해 백성을 다스렸다. 사대부들은 과거제나 관리 추천을 통해 관직에 등용되었다. 9세기에 절도사로 알려진 지역 군 통치자들이 성장하면서 이러한 통치 체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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